나의 사회성. 어디에도 척척 걸리는 나의 사회성. 여섯 단계까지 거치지 않더라도, 몇 번만 말 섞으면 어렵지 않게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솎아낼 수 있는 넓은 발이 나름대로는 장점이었다. 그에게 은근슬쩍 자랑하듯 나의 사회성을 얘기하다보니, 이것참 이 사회성이란 게 사회성이 아니다. 내 사회성은 조직과 규율, 불문율과 처세술이 횡행하는 사회에서의 사회성이 아니다. 내 사회성은 그보다는 동물의 사회성을 닮았다. 늑대의 사회성. 꿀벌의 사회성. 잉어의 사회성.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만나면 마냥 놀 뿐이다. 내 사회성은 수평의 사회성. 느슨한 사회성. 인간의 사회에 발끝을 걸친 채 위태롭게 넘어 다니는, 애정을 빼면 앙상한 줄기조차 남지 않는 사회성이다.
그에 비해 그의 사회성은 말 그대로 사회성이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만나는 사람의 폭도 협소한 그는 인간 사회의 돌아가는 법칙을 잘 알고 있다 했다. 그러기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조직에서 잘 견디며, 순조롭게 항해한다. 그의 사회성은 수직의 사회성. 치열한 사회성.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람이 어디쯤 있는 건지, 나는 도통 가늠이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읽던 책에서 나는 "사교성"과 "사회성"이라는 단어를 찾아낸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구분해낸 군중의 다양체와 무리의 다양체 중에서, 굳이 억지로 나누자면 나의 "사교성"은 무리의 다양체에 가깝다. "흩어짐. 분해될 수 없으나 가변적인 거리들, 잔류자나 횡단자로서의 불평등. 고정된 총체화나 위계화의 불가능성, 방향들의 브라운 운동적 다양체, 탈영토화의 선들. 입자들의 투사." 무리 속에서 각자는 남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혼자다. 각자는 패거리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하며, 언제나 자신이 가장자리에 있음을 깨닫는다. 가장자리에 있다가 안쪽으로 가게 되고, 안쪽에 있다 이내 가장자리로 오게 되는 브라운 운동. 그 안에 내가 있다.
"사회성"은 군중의 다양체에 가깝다. "거대한 양, 구성원들의 가분성과 평등함, 중앙집중, 집단 전체의 사회성, 일방적인 위계의 방향, 영토성이나 영토화의 조직, 기호들의 방출." 그 안에서 사람들은 획득한 것을 확고히 하고 자본화하며, 안전하게 군중 속에 묻어있고, 중앙에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그가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진화적으로 미개한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는 없다. 무리와 군중은 분리되어있지조차 않다. 군중 속에는 무리가 있고 무리 속에는 군중이 있다. "어떤 군인은 늑대가 되고 어떤 군인은 개가 된다." 그리고, 늑대와 개가 만나서 한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레모네이드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아. 그것 참 이상하다. 개의 늑대성과 늑대의 개성은 어디서 만나는 것일까. 뭉클뭉클한 다양체의 다양함 속에서의 마주 바라봄이 있었다. 서로의 길을 가다가 만나듯,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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