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리 새벽 강가에서, 나는 푸르게 바랜 풍경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주선 너는 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하얗구나. 말갛게 닦아주고 싶다. 소매 끝을 쥐고 팔뚝으로, 너는 내 앞에서 유리창 닦듯 내 얼굴 닦는 시늉을 했다. 오래 오래. 너의 흔들리는 팔뚝에 나는 핏기하나 없는 내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그렇게, 한 장의 백지가 놓였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 자리에.
네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말을 들었기에 내 얼굴이 그토록 하얗게 질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네 말은 나를 찌르고, 하얗게 얼어버린 나를 지나쳐 먼 곳으로 흘러갔다. 그 강가에 남아있는 것은 한 장의 데드마스크. 그리고 그 얼굴을 정성껏 닦는 시늉을 하던 너의 팔뚝 뿐이었다. 내 얼굴과 네 팔뚝에 달려있던 몸은 풍경 속에 희미하다. 우리의 입김이 하얗게 공기 중으로 떠올라 사라졌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한 장의 백지가 놓인다는 건,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너와 나만의 관계가 막,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때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눈부신 하얀 지면을 바라보았다. 없던 곳에 놓인 그 백지는 저를 딛고 시작될 사건들을 내내 받치고 있을 터였다. 어떤 이들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백지에 글을 쓰고, 어떤 이들은 백지 위에 발톱을 깎아놓고, 어떤 이들은 백지 위에 구토를 할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었을 때가 차라리 그리웠을테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그곳에는 백지 한 장이 놓였다. 밤새 눈 내린 하얀 눈밭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듯, 이제, 시작될 것이었다.
아주 천진하게 갈 수도 있었으리라. 아이들이 주저앉아 색색가지 크레파스로, 서툰 손이 내미는 데까지 멈추지 않고 선을 그어내듯이. 그러다 내키는 대로 방향과 색을 바꿔 결국 거대한 그림 한 장을 만들어내듯이.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내내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섣불리 손댈 수 없어서, 그 한 장의 종이를 망칠 수 없어서 끝없이 망설이며. 또 어떤 이들은 유리창에 그러하듯이 입김을 불어가며 조금씩 고쳐그리기도 할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저 더 짙은, 더 짙은 색으로 칠해 모든 실수와 실패를 덮으려고만 할지도 모른다. 모든 관계들은 대개 그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
너와 나는 그 백지 위에 무엇을 쌓았던가. 아무것도 없던 데서 우리는 그림 한 장을 그려내었다. 그것은 너와 나의 밀고 당기기, 너와 나의 침입과 침투가 그려낸 그림이었다. 그날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지워내기라도 하듯, 우리는 백지 위에 빼곡이 무엇인가를 채워넣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이기도 했고, 독설이기도 했고, 말없는 쓰다듬음과 이해받을 수 없는 눈물이기도 했다. 백지는 젖고 얼룩지고 찢어지고 기워졌다. 포기할 수 없는 마음으로 우리는 그 백짓장을 맞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가끔은 그것으로 눈물을 훔치고, 소맷부리로 살살 더러운 것도 닦아내면서.
그 위에 우리는 성을 쌓았다. 둘만이 등장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블록장난감 쌓듯 모래성 쌓듯 쌓고 부수다가도, 모서리에 난 사소한 긁힌 흔적을 보며 울었다. 빈틈없이 꽉 채우고 싶어 서두르다가도 빽빽한 밀림에서 답답하다며 소리쳤다. 서로를 긁은 상처는 길이 되기도 하고, 어느 사이엔가 붙어서 땅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찾아가는 지도였다. 서로의 길이 결코 닿지 않는, 이상하고 복잡한 지도였다.
이제는 백지가 아니게 된, 너와 나 사이의 굴곡 깊은 지도가 언제 사라졌는지도 기억한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너의 어떤 말이 나를 꿰뚫고 지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때 너와 나 사이를 빽빽하게 이어주던 혈관 같은 선들이 툭툭, 끊겨나가던 것은 기억한다. 어쩌면 이미 많은 선들이 끊겨 나간 상태에서 지탱하던 가장 굵은 줄이 끊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고, 이제 더 이상 백지가 아닌 백지는 사라졌다. 제 꼬리 잘라낸 도마뱀처럼 나는 너에게 돌아서서 왔다. 어디선가 공허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원래 없던 것은 원래 없는 것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너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 하얗게 불태웠지. 그 목소리에 묻어있는 그리움과 저어함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가장 무색무취한 목소리로, 나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기억나지 않아, 라고. 너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표정으로 마주보았을 뿐이었다.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백지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다. 나는 내 표정을, 내 낯빛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미 없어진 지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서로 뜨겁게 불타오르다가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이후에는, 그 불꽃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남지 않는다. 백지였을 때는 서로에게 하고 싶어 퐁퐁 솟아나던 오골오골한 말들은 어느 틈엔가 납작해져서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 뒤에 생겨나는 모든 회상의 언어들은 이미 죽은 언어다. 발 디딜 데 없는 말들은 궁싯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다 같이 빛바랬다. 이제는 그 경계도 알 수 없이, 그렇게 나달나달하게 낡아갔다. 본래 제 색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종이 한 장처럼, 내 대뇌의 어느 부분에 잊혀진 채 압정으로 꽂혀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었다. 뜨겁게 불타올라서가 아니라, 세월을 이기지 못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렇게 소리없이 바스락바스락 부서져내릴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얗고 가장 차가운 재가 될 것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색을 다 썼을 때, 나는 그것이 모여 다시 흰색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가 낳는 신비였다. 색과 색으로 구별되는 길을 그려내려했을 때, 지도 속의 길은 가장 복잡하고 가장 험난하고 가장 머나먼 길이 되었다. 그러나 단지 흰색이었을 때, 그 종이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 되었다. 온통 길인 길. 한 걸음이면 갈 길. 그것을 알았을 때쯤엔 이미 너는 없다. 그리고 너에게, 나는 없다.
(젯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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